혜미야, 니는 한달 용돈이 얼마고?

12,000원요.

본래는 22,000원이었는 데 10,000원은 팔레스타인에 사는 헤스(?. 정확하지는 않다.)에게 보내고 있어요.

어, 그래?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게 됐지?

월드비젼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아, 한비야가 하는 월드비젼?

맞아요, 그리고 사실은 내용돈 10,000원에 엄마가 보태주신 10,000원을 합해서 20,000원을 보내고 있어요.

어, 그래. 대단하네.

혜인이도 보내고 있니?

예, 저는 10.000원요.

같은 아이에게?

아니요, 다른 아이요. 

혜미는 팔용초등학교 5학년생이고 동생 혜인이는 3학년생이다.

아버지는 자영업을 하시는 데 부유한 편인 듯 했다. 둘다 미국에서 3달간 어학연수를 하고 11월에 다시 학원으로 돌아온 아이들이다. 

아내가 운영하는 유치원이 있는 건물 3층에는 역시 아내가 하는 조그만 보습학원이 있다. 작년까지는 유치원차가 학원 아이들도 태웠는데 금년들어 유치원 아이들이 많이 줄어 어쩔 수 없이 두 대의 차중 한 대를 줄이는 바람에 아내가 직접 학원 아이들을 태우기로 했다. 여름에는 농사일 때문에 가끔 거들었지만 가을들면서부터는 거의 매일 차를 운행하고 있다. 아이들은 몇 안되지만 4시간 정도를 혼자서 운행하니까 그것도 상당히 힘들었다. 그래서 둘이서 나누어 운행을 한다. 자영업자들의 어려운 경제사정이 우리집이라고 비껴갈 리 있겠는가.

유치원을 시작한지 30년이 가까워 오는 데 직접 차를 운행하는 것은 처음이다.
혜미와 혜인이 등을 내려놓고 봉곡동으로 성식이를 태우러 가면서 생각에 잠긴다.
참 기특한 애들이다. 남을 도울 생각을 다하다니!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외국 아이를 말이다.
그 부모들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오늘의 나는 어렵게 사셨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고향 사람들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
다.

인기 없는 농대를 다닌 것도,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시작하고 농민운동을 하며 진보정당운동에 뛰어든 것도 다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나를 조롱하고 있다.

나는 악을 쓰다싶이 살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란 존재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뭐란 말인가 하는 자책밖에 없다. 

연말이다.

신문은 벌써 구세군 남비 소식을 전하고 있다.

곧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신 분들의 이름이 올해도 어김없이 테레비뉴스 끝자락을 장식할 테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하다’는 모범 사례도 몇편 소개될 지 모른다.

이런 분위기가 되면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한다.

지금 당장이 급한 사람들에게 사회적 온정은 절실하다. 제코가 석자라며 남챙길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사람이 대부분일 세상에서 조그만 성의라도 베풀 줄 아는 사람들은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다.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 도우며 사는 세상이 가장 바람직하고 인간다운 세상 아니겠는가?
자신도 어려우면서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공영방송이 여러 형태의 성금 걷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거부감을 느낀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도움은 필요하지만 불우한 사람이 없는 세상이 더 절실하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위해 공영방송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사람들을 어려운 처지로 내모는 국가 정책이나 제도에 대해서는 눈감고, 입다물면서 천연덕스럽게 불우이웃돕기운동이나 하는 것은 위선이다.

홍수나 태풍 같은 재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한 의연금이나 불우이웃돕기 성금 같은 것은 국가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국민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지 않도록 할 의지와 능력이 없는 그런 국가는 존재 이유가 없다. 

별반 내세울 것 없이 사는 사람들을 서민이라고 한다. 서민은 다시 그 내세울 것의 정도나 경제적 처지에 따라 불우이웃이 되거나 사회적 약자가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서민, 불우이웃, 사회적 약자로 만들면서 그들을 짐취급한다.)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든 구별해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는 말에는 의도했든 안했든 관계없이 독이 들어있다.
서민, 불우이웃, 사회적 약자라는 말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계속 사용하면 특권층이 소외층을 배제하고, 억압하며 수탈하는 불평등한 질서가 사람들의 의식속에서 은연중 기정사실화 된다.
그리하여 힘없고 돈없는 놈은 서민, 불우이웃, 사회적 약자로 힘들게 살고, 힘있는 사람, 돈있는 사람은 특권층으로 호의호식하며 사는 세상이 당연시 된다.
빈부귀천, 약육강식의 불공평하고 불평등한 질서가 이렇게 당연시 되면 서민이니, 불우이웃이니, 사회적 약자니 하는 말이 아무 거부감 없이 통용되면서 다시 인간차별의 질서가 철칙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것은 소수의 힘으로 다수를 지배해야 하는 지배세력의 노림수다. 불평등한 질서에 대한 순종의식을 평범한 사람들의 머리속에 기정사실화하고, 이러한 불평등한 질서의 불가역성을 다수가 받아들이도록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권력자, 사용자가 갖고 있는 위력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감하기 때문에 차별의 질서를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것으로 수용한다. 이리하여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는 차별의 질서가 굳어진다. 그리고 이 질서가 깨지지 않는 한 평범한 다수의 고난의 행군은 끝나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갈등과 충돌, 대결은 당연히 경제적 이해에서 비롯되고 이 대결에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힘만이 아니다. 내세우는 명분(가치)과 주장의 타당성이 얼마만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본가적 가치와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보수세력이 공중파 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발악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지배층의 위선이나 거짓말을 폭로할 경우의 파괴력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사정없이 목을 날려버린다.

지배자들을 향해 죽일 놈이니, 나쁜 놈이니 하는 욕은 그들에게 별 타격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는 말을 그들은 제일 두려워 한다. 그들은 친기업을 하면서도 친서민을 입에 달고 다니는 데, 이런 허구가 깨어지면 그들의 권력, 그들의 지배질서는 위태로워진다.

현재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도움을 받는 처지에 있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이 불우이웃이라는 말이 필요없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역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동정이 아니라 국가의 돌봄이 필요하다. 국가의 배려와 보살핌이 누구나 누리는 권리가 되는 그런 국가가 바람직한 국가다. 자선심이 위선이 안되려면 누구는 자선을 베풀고 누구는 받아야 되는 불공평한 나라에 대한 문제의식에 흔쾌히 동의해야 한다.

근본적 변화에 필요한 문제의식의 공유야 말로 보통 사람들을 서민, 사회적 약자, 불우이웃으로 내몰지 않는 나라를 만드는 출발이 될 테니까!

서민, 불우이웃,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강자, 승자, 권력자, 기득권자의 시혜가 아니라 이들이 누려야할 당연한 권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최선의 배려는 사람들이 자신을 불우한 약자이거나 서민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사회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기득권 위에 안주하면서 자신이 누리는 호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을 내밀며 배려하는 척하는 것은 위선이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 운운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약자도 강자도 없는, 더불어 사는 나라를 지향하는) 진보적 정당들의 진출과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진입장벽은 완강하게 고수하려하는 위선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어부에게 고기를 줄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최선의 자선이다. 역경에 처한 사람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자선을 공영방송이나 언론이 권하고 호소하거나 장려하는 나라는 부끄러운 나라다. 그 일은 당연히 국가가 해야할 일이니까.

 

 

Posted by 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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