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SOCIETY] 내가 겪어본 복지국가 스웨덴

기사입력 2009-09-29 오전 9:37:29

일찍이 1932년부터 집권한 스웨덴 사민당은 시장 친화적 경제 정책과 평등주의적 분배 정책을 동시에 추구하여 오늘날 전 국민의 고용, 보육, 교육, 건강, 노후생활까지 책임지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하였다. 나아가 노사관계, 삶의 질, 환경, 양성평등, 투명성 분야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노인과 장애인의 낙원필자가 1968년 스웨덴에 입국하여 받은 충격적인 첫 인상은 '이 나라에는 왜 이렇게 노인과 장애인들이 많은가, 우리 한국에는 별로 없는데' 하는 것이었다. 한참 뒤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길거리에 나온 노인들은 아이들과 자녀들이 모두 학교직장으로 나간 텅 빈 거리를 퇴직한 노인 부부들이 한가롭게 장도 보고 산책하고 있는 모습이었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 역시 여유롭게 볼 일 보러 시내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한국에도 정신, 지체 장애인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의 외출을 배려하는 편의시설이 전무한데다 가정에서조차 장애인을 가문의 수치로 생각하고 집안에서 연금 상태로 살아가게 한 탓이었다. 장애인에 대한 인권 차원의 배려는 집밖에서나 안에서나 전혀 없던 시대였다.스웨덴의 장애인 정책은 시설에서 편안한 숙식만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개인의 능력에 걸맞게 사회생활 적응 훈련도 병행한다. 오전 중 한가한 시간대에 백화점 같은 대형 상점에 가면 정상인과는 좀 다르게 보이는 사람들이 10여 명씩 떼 지어 다니며 이것저것 물건도 고르고 계산대 앞에서 자기 지갑을 꺼내 계산하는데, 그 동작이 서툴고 굼떠 보인다. 물론, 옆에는 이들을 돕는 도우미가 있다. 바로 정신장애인들의 사회적응 훈련의 한 장면이다. 놀라운 것은 계산대 여직원의 친절한 협력적 자세뿐만 아니라,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반 손님들의 이해와 인내심을 통한 배려하는 마음이다. 어느 누구하나 '빨리 빨리'하며 짜증스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 자기보다 못한 이웃에 대한 공동체 정신의 발로라고 여겨지는 순간, 진정한 인도주의 사회란 바로 이런 곳이구나 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편, 노인들에 대한 예우에 있어서도, 한 평생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다가 정년을 맞았으니 여생을 편히 쉬시라고 65세 이상의 모든 노인에게 연금이 지급되며, 이를 토대로 1960년대에 이미 실버타운 수준의 양로원을 마련해주었으니, 이만하면 노인 천국이라 할 만하지 않는가.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도의 개념도 잘 모르는 스웨덴 사람들이 이렇게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동안, 효도를 인륜의 근본으로 받들어 온 우리네 노인들에 대한 예우는 오늘날 어떠한가?

▲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스웨덴 노인들. ⓒ프레시안

늙어서도 공부하는 평생교육반세기 전부터 스웨덴에서 교육은 개인의 권리처럼 인식되어 왔다.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교육은 국비로 충당하므로 개인은 선택한 분야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직장생활을 하다가도 부족한 분야를 재충전하고 싶으면 언제든 휴직을 신청하고 대학 또는 전문학교에 가서 공부한 후 복직할 수 있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휴직 후 공부하는 분야가 직무와 직접 관련이 되면 봉급의 90%, 절반 이상 유용하면 70%를 받아 생활비로 충당하고, 전혀 무관하면 봉급 지급은 없는 대신에 정부의 대여 장학금을 받는다.그 밖에도 다양한 평생교육제도가 있는데, 정부가 인가한 10여 개의 성인교육협회(Studieför-bundet)가 주관하는 학습 동아리들이 주류를 이룬다. 과목별로 5명 이상의 수강생이 있으면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있고, 분야는 IT, 경제, 외국어, 일반사회, 국제관계를 비롯해 음악, 연극, 수예, 회화 등 다양하며, 실기 위주의 인기과목은 학습과 함께 취미활동을 겸한다. 활동 운영비는 정부와 광역/기초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며 참가자는 실비 위주의 저렴한 수강료를 낸다. 1977년 전국 28만9000개의 각종 동아리에 참가한 성인 학생은 270만 명이나 되었고, 그 중의 절반이 여성이었다. 스웨덴 인구 800만 명 중 성인인구(20~67세)를 약 500만 명으로 추산할 때 성인들의 절반 이상이 어떤 형식으로든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탁아소 식당에서 장기간 요리사를 하던 한 할머니에게 이제 정년퇴직을 하면 심심해서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바로 영어 동아리에 참가하여 영국에 가면 말이 잘 통하지 않던 문제를 해결할 셈이라고 기대에 차 있었다. 부엌에서 함께 일하던 보조 할머니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니, 자기는 평소에 숫자 계산에 재미를 느끼니 회계나 경영 쪽의 공부를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동아리 학습의 참가자들은 65세 이후의 퇴직 노인들이 대다수인데, 훌륭한 예방의료 덕분에 이들은 퇴직 후에도 왕성한 활동이 가능하다. 수업은 직장인을 고려하여 주로 야간에 실시된다.대표적인 학습 동아리는 1912년에 발족한 노동자교육협회(ABF)로 사회민주당, 전국노총, 소비자협동조합이 협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발족 당시 노동자 계층에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서 이 학습 동아리의 역할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민교육의 기원은 문맹률이 꽤 높았던 1800년대 말 마을 주부들이 초롱불을 켜들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야간 독서회를 운영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성인들의 동아리 학습은 국민 일반의 교양 수준을 높이는 한편, 스웨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수호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깨어 있는 주인에 부지런한 머슴

▲ 스톡홀름 거리 풍경. ⓒ프레시안

민주국가에서 국민은 주인이요, 공직자는 국민의 공복이요 머슴이라고 한다. 주인과 머슴의 관계는 상대적이라서 주인이 똑똑하면 머슴을 잘 부리게 되고, 주인이 어리벙벙하면 약삭빠른 머슴은 주인을 골리고 자기 잇속만 챙기려든다. 그래서 주인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감시 감독의 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구체적으로,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국정을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대 국민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아니면, 잔꾀를 부려 국민을 기만하려드는 것은 아닌지, 평소에 정확히 평가하고 기억해 두었다가 매 4년마다 찾아오는 심판의 날, 총선에서 엄정한 심판을 내려야한다. 그 동안 일을 잘 했으면 재신임의 상을, 못했으면 정권교체라는 벌을 내리는 것이 대의제도의 핵심이다. 투철한 주인의식과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주인 행세를 제대로 하는 국민 중의 하나가 스웨덴 사람들이다. 그들의 주권재민 의식이 얼마나 철저한가는 총선 참가율이 90%대를 유지하는 것으로 증명된다(1976년 92%, 2006년 87%).그러니 수상으로부터 장차관의 고위직 공무원과 국회의원들은 항상 국민을 두려워하고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옷차림이나 언행은 물론, 주택구조에 이르기까지 주인의 눈살을 찌푸리지 않도록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니 요즘 우리사회에서 시끄럽기만 하지 좀처럼 실천되지 않는 노블리스 오블리주(고위지도층의 도덕적 의무) 같은 것은 아예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확고한 주인의식의 토양은 학교교육과 평생교육을 통해 쌓인 높은 정치의식과 교양수준에서 배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국민의 편에 서서 항상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정론을 이끌어가는 언론의 역할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아무리 보수성향의 신문이라도 최소한 합리적 논조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며 자사의 이익이나 특정계층의 이익을 옹호하고자 사실을 왜곡하여 국민의 판단을 헷갈리게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국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이 그런 사이비 언론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출세욕 없는 사람들?

▲ 기술 교육을 받는 스웨덴 학생. 장인을 존경하는 문화는 북유럽 사회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직업과 학벌에 따른 차별이 적은 문화는 입시 과열이 생기지 않는 주요 이유다. ⓒ좋은교사

경쟁이 불가피한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스웨덴의 보통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마음을 비운 것같이 보인다. 남보다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 더 좋은 집, 더 화려한 옷, 더 좋은 대학 입학을 쟁취하고자 불꽃 튀기는 경쟁이나 이글거리는 탐욕 같은 것이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특히 자녀에 대한 투자, 궁극적으로 내 자식의 출세를 위한 물불 가리지 않는 총력전은 아예 상상도 못한다. 스웨덴의 모든 교육은 정규학교의 공교육으로 끝나며, 남보다 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사교육이라는 것이 없다. 그래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그러면 우리나라의 가히 망국적이라고 할 사교육은 왜 이렇게 과열되고 있는가? 한마디로 내 자식을 이 사회의 상층부로 올려놓겠다는 불굴의 집념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상층부를 향해 끝없이 질주하는가?스웨덴 사회를 거울삼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는 모든 권력과 부가 상층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권력의 힘이 공적 영역보다 사적 영역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단적으로 청와대 청소부에게까지 권력의 연줄을 대어보려는 시도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스웨덴은 우리와 똑 같은 민주사회라 하지만, 모든 권력이 고루 분산되어 있어서 상층부라도 힘을 쓸 수가 없다. 물론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장차관, 국회의원, 공무원들에게 막강한 권력이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권한 행사는 법령과 규정에 따라 자기에게 위임된 공무를 집행할 때만 유효한 것이지 공적 업무의 성격을 벗어나 사적인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말 한마디 부탁할 수 없는 것이 그 나라 관료사회의 관행이요 분위기다.그러기에 모든 법 규정은 구체적이고 명확하여 공무 집행자의 자의적 해석이나 임의적 판단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국민 개개인은 법에 의해 자기의 권리를 보호 받고 또 행사할 수 있다. 그러니 높은 자리에 올라가 보았자 고율의 세금을 제외하면 소득도 크게 늘지 않고, 벅찬 업무와 책임감만 뒤따르며, 청탁이 불가능하니 부수입도 없다. 스웨덴은 국제투명성 조사에서 상위에 속하는 국가로 공무원의 부정비리가 없는 투명하고 깨끗한 나라이다. 이쯤 되면 자식의 출세가 실속은 없어도 가문의 영광이라도 되지 않는가 하겠지만 스웨덴에서는 그 마저 이미 사라진 전근대적 가치관에 불과하다.한편, 우리나라는 반세기 전과 비교할 때 권력의 사적 남용이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스웨덴 관료사회의 원리원칙주의 관행에 비하면 아직도 요원하다. 지난 10년간 이 땅에 민주화가 많이 진척되었다고 하지만 일반 국민의 위법행위는 엄격히 처벌하면서 고위공직자 후보의 범법행위는 사소한 허물이나 실수로 간주하고 넘어간다면 어느 누가 권력의 자리를 부러워하지 않고 상층부 진출을 마다하겠는가. 무릇 민주국가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잣대의 하나로 권력의 사유화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는 나라는 법치주의가 살아있는 정통 민주국가이며, 공권력의 사적 남용이 심한 나라는 후진국가 내지는 사이비 민주국가이다.그렇다면 돈도 출세도 명예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스웨덴 사람들은 무슨 희망과 욕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반세기전에 제도화한 국가의 포괄적 복지제도 덕분에 개개인은 자기가 선택한 직장에서 하루 8시간 열심히 일하며 가족과 함께, 이웃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보람이며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말하자면, 사회정의가 강물처럼 도도히 흐르니 그곳에는 약자의 억울함도 강자의 오만함도 없이 모두가 나라의 주인으로 자기 일에 충실하며 겸허하고 소박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한국형 '역동적 복지국가'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변광수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고문·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Posted by 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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