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교육, 남녀임금평등, 야간노동폐지, 정·교분리, 노동자자치기업, 외국인들에게 시민권 부여…. 이 놀랍도록 진보적이고 이상적인 생각들은 1871년 3월18일부터 파리에서 72일 동안 유지됐던 파리코뮌에서 실천됐던 일들이다.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는 제2제정의 암흑기 속의 프랑스. 1870년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 탓에 시민들은 극심한 기아와 굴욕을 견뎌야 했다. 황제는 달아나고 임시의회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협약을 체결하자 이에 반발한 파리시민들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의 수장이던 티에리와 부르주아들은 구체제의 상징인 베르사유로 달아났고, 파리시에는 시민들이 남아 직접선거를 통해 92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시민의회를 만든다.

노동자 30%, 수공업자, 상인, 언론인, 예술가, 의사 등으로 구성된 의회는 시시각각으로 시민들과 토론하며 스스로의 권리를 규정하고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갔다. “시민들이여, 스스로를 통치하라”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모든 원칙들이 매순간 토의되고, 그것이 실천되는 방법을 지켜보는 모두의 눈이 있을 때에만 공화국의 꿈은 질식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외쳤다.

이 꿈 같은 시절 속엔 민주적인 정치적 실천만 있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문화적인 삶 또한 활짝 피었다. “모든 수업은 개방됐고, 우린 학교에서 예술, 과학, 문학, 민중의 삶을 배웠다. 모두 저 낡은 세상으로부터 어서 빨리 달아나고 싶은 마음에 들떠 있었다” 파리코뮌의 여성그룹을 대표하는 루이즈 미셸은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코뮌은 도서관·박물관·공연장을 개방했고 튈르리공원에서 열리는 콘서트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시민들의 끓어오르는 문화적 열망을 만개시키는 임무는 당시 쿠르베, 도미에 등으로 구성된 예술가 연합에 맡겨졌다.

코뮌이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기 시작한 5월21일에도 튈르리공원에선 대규모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외국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은 몰래 군대를 투입시켜 일주일간의 시가전 끝에 코뮌을 함락시킨다. 이때 정부군은 여자, 아이들을 포함해서 30만명의 파리시민들을 사살했다. 파리코뮌이라는 유토피아를 겪은 모든 자들을 말살하여 이 아름다운 경험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이는 일종의 계급에 대한 멸족이었다. 그만큼 파리코뮌은 지배계급에게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사건이었다. 입에 올리는 것조차 한동안 금기시 돼왔다. 그런 이유에서 파리에는 오랫동안 시장이 없었다. 지배계급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파리코뮌의 기억은 파리라는 도시를 한손에 장악할 수 있는 권력을 아예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1977년에 이르러서야 파리는 시장을 갖게 됐다. 초대 시장이 자크 시라크, 지금의 들라노에 시장은 세번째 파리시장에 불과하다.

올해 파리코뮌은 140주년을 맞는다. 파리시는 청사 안에서 코뮌이 진행되던 바로 그 시기 동안(3월18일~5월28일) 코뮌을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다. 당시 의회가 시민들에게 발표한 포고문, 코뮌을 이끌어갔던 사람들의 면면, 치열했던 1주일간의 전투, 마네·쿠르베 등의 예술가들이 화폭에 담아낸 혁명적 시간들이 꼼꼼히 담겨있다. 비로소 프랑스 지배계급은 코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한 걸까. 아니면, 사르코지 1세 치하에 신음하는 프랑스가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었던 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지도. “시체들은 땅에 뒹굴었지만 그들의 사상은 일어섰다.” 빅토르 위고는 파리코뮌이 남긴 긴 울림을 이렇게 적었다. 그 긴 울림이 이제, 여기 저기에서 빛나던 사상들을 일으켜 세우기를

경향신문, 4월 30일 목수정의 파리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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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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