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의료원에 문병을 갔던 때의 일이다. 병원 입구 경사로에서 휠체어를 밀고 올라가는 분을 보았다. 반사적으로 휠체어에 손을 대고 밀었다. 그랬더니 자신은 운동 중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 아닌가! 얼굴이 화끈했다. 거리에서 휠체어를 만나면 그 때의 무안했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장애인들이 겪는 여러 가지 불편과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은 국가적 과제이지만 장애인들을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편견 교정은 개인의 문제다.

‘장애인은 비장애인들이 도와줘야 할 비정상적이거나 불구적인 사람이 아니며,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선행이나 희생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라는 관점이 보편화되어야 한다.

나에게 이런 깨우침을 주었던 소설가 은희경의 글(2001년 12월 28일자 한겨레 신문 게재)

‘장애인들이 행복한 나라’를 다시 꺼내 읽으며 다른 분들과도 나누기 위해 여기에 소개한다.

 

장애인들이 행복한 나라

 

미국의 한 언론인이 이런 말을 했다 한다. “나는 흑인이 될 수는 없고 여성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장애인이 될 수는 있다.” 흑인과 여성과 장애인은 오랜 기간 차별을 받아온 사회적 약자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장애인 문제는 어느 누구에게나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인식이 사회전반에 합의가 된 덕분일까. 그 나라에 가면 공항에서부터 장애인용 시설 안내표지를 쉽게 볼 수 있다. 미국을 무척 싫어했던 내 친구가 하는 수 없이 이민을 준비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장애인인 자기의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는 일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의 권리에 관심이 적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휠체어가 넘어갈 수 있도록 거리의 턱을 없애는 일조차 실행되고 있지 않다. 거리를 다니는 장애인이 눈에 띄지 않으므로 외국인 여행자들은 한국에는 장애인의 수가 이렇게 적으냐고 묻기도 한다.

물론 일상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장애인 시설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자신이 장애인에 대해 편견이 없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장애인은 보통 사람들이 도와줘야 할 비정상적이거나 불구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선행이거나 희생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타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이다. 일행 중 키 큰 사람이 선반 위의 물건을 내리듯이 당연히 해야 할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지난 겨울 스키장에서 특수한 장비를 이용해 스키를 타는 장애인들을 보았다. 두 다리가 없는 사람도 가파른 얼음능선을 타고 산을 내려가는 일이 가능할 뿐아니라 즐기는 모습이었다.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감동, 그것이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장애인을 특별한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삶의 조건이 제한돼 있거나 혹은 약간 다를 뿐 나와 똑같다는 사실을 그때는 인식하지 못했다.

외국여행 중에 동성애자들의 축제를 구경하게 되었다. 개인 자격의 동성 파트너들은 물론이고 각 지역 대표, 기업체와 대학교와 경찰서 같은 근엄한 조직에서까지도 대표들이 나와 동성애자임을 내세우며 축제의 형식으로 권리 주장을 했다. 화려한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인파들 틈에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도 종종 눈에 띄었다. 축제가 끝난 뒤 내가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휠체어에는 말을 할 수 없고 고개조차 똑바로 들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이 타고 있었다. 그의 앞에 버스가 섰고, 버스 기사는 레일 비슷한 장치를 내렸다. 그것을 타고 휠체어가 차 안으로 올라오는 동안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만원버스의 승객들은 그 장애인 한 사람을 위해 끈기있게 기다렸다. 이윽고 버스에 올라탄 그가 휠체어에 붙은 버튼을 누르자 “시립병원까지 갑니다”라는 녹음말이 흘러나왔다.

그런 중증 장애인이 남의 도움없이 혼잡한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는 사회 시스템, 비록 장애인이지만 동성애를 지지하고 축제를 즐기기 위해 외출을 꺼리지 않는 행복의 권리에 대한 당당함, 그 모든 것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버스 승객들의 “타인의 권리를 존중함으로써 내 권리를 보장받는다‘는 합의, 내게는 모두가 다 경이였다. 그때의 인상이 하도 강렬해서인지 또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 나이트 클럽에서 휠체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애인과 함께 춤추는 장애인을 보았을 때에는 이미 신기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편견은 교정할 수 잇는 것임을 알았다.

장애 학생들을 일반 학생들과의 통합 캠프에 참가시켰다는 이유로 한 교사가 해임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장애 학생들이 일반 학생과 한 교실에서 공부하는 상상을 해본다. 입시위주교육에 젖은 학교쪽과 학부모는 학습능률이 떨어진다, 횐경이 다르다면서 반대를 할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의 권익에 대한 교육은 사회전반을 성숙하게 만들 것이다.

Posted by 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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