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조 흥범(서경대학교 생물공학과 교수)

 

적자생존과 약육강식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의 운영원리는 곧 우리 삶의 운영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50여년전 자연을 유심히 관찰하던 다윈(Charles Darwin)은 ‘자연계의 모든 구성원은 다른 생물 또는 외부의 자연과 전쟁 중’이라고 설명했고, 헉슬리(Thomas Huxley0는 좀 더 극단적인 표현을 써서 ‘동물의 세계는 휴식시간이 없는 검투사의 시합’이라 했다.

이러한 주장의 토대는 ‘생물은 무제한적으로 성장하려는 본능을 가졌으나,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제한적’이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원초적으로 치열한 경쟁상태에 놓여있어서 생존을 위해서는 항상 투쟁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과연 생물은 무제한적으로 성장하려는 본능을 가졌을까?

 

다윈은 코끼리의 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코끼리는 30살이 되면 새끼를 낳기 시작해서 90살까지 출산을 할 수 있는데, 한 쌍의 코끼리가 일생동안 6마리를 출산하게 되고, 이로부터 750년이 지나면 한 쌍의 코끼리가 1,900만 마리에 이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지구는 코끼리로 뒤덮힐텐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굶주림, 이상 기후, 질병 등 외부요인에 의해 ’죽음‘으로써 그 군집의 규모가 조절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지만 실제 코끼리 암컷이 생식능력을 가지는 시기는 8살에서 30살까지 다양하며, 대체로 55세까지 출산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끼리 군집이 적정한 규모를 넘어서면 생식 가능한 시기가 늦어져서 30세에 이르러서야 임신이 가능하고, 만약 적정한 군집의 규모보다 작아지면 8세부터 임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코끼리는 무작정 번식을 하고, 그 군집의 적정 규모는 외부요인에 의한 ‘죽음’으로써 조절된다’ 는 다윈의 주장을 뒤엎는 사실이다. 즉 코끼리에게 있어서는 적정 군집규모를 유지하는 내적 조절기작(mechanism)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야생의 코끼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와같은 일은 실험실에서도 관찰이 가능하다.

생쥐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사육을 하는 데, 한 그룹은 사육공간을 적정한 규모로 하고 다른 그룹은 과밀한 규모로 사육하면서, 생식 주기를 관찰해 보았다. 적정한 규모의 사육집단에서는 암컷의 배란 주기가 매우 규칙적이었으나, 과밀한 사육집단에서의 암컷은 배란 주기가 점차 불규칙해지다가 마침내 배란을 멈추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생물이 무한히 증식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을 영위하는 데 적정한 군집의 규모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예는 매우 많다. 집에서 기르는 닭들도 그대로 두면 한 배에 품을 수 있도록 12개 정도의 알을 낳지만, 매일 매일 알을 제거하면 1년에 360개의 알을 낳는다. 새들 중에는 군집내에 새끼를 낳지 못하는 새들을 예비로 비축하다가, 만약 사냥 등에 의해서 수컷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면, 생식능력이 없었던 예비의 새들이 수컷으로 대치됨으로써, 자신들의 적정한 군집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생물들의 다양한 경쟁회피 메카니즘(기작)

 

자연에서의 생물들은 스스로 군집규모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경쟁을 회피하는 다양하고 능동적인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각자 고유한 ‘생태적 지위(ecological niche)'를 가지는 것이다.

실제로 동일한 서식처의 유사종들 사이에 동일한 생태적 지위를 가지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13종의 갈라파고스 핀치새는 서로 먹이 선호도를 달리함으로써 경쟁을 회피하며, 먹이 선호도와 부합하는 각기 다른 형태의 부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공염불이 아니고 실제에 있어서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건 사회적 대우나 보수가 공평하게 되면 특정 직종을 거머쥐기 위해 피터지게 경쟁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발췌 편집자) 메기나 송어처럼 동일한 먹이사슬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서식처를 공간적으로 분할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동일한 서식처에 먹이 선호도가 같은 동물들 사이에도 나방과 나비, 조류와 박쥐처럼 동일 서식처를 시간적으로 분할함(낮과 밤)으로써 효율적으로 경쟁을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크기와 모양, 먹이 선호도조차 동일한 다섯 종류의 솔새들이 어떻게 가문비나무 숲에서 함께 서식할 수 있는지를 관찰한 메카서(R. MacArther)의 고전적 연구에 의하면, 서로 다른 높이에서 먹이를 찾으며 각기 숲을 관통하는 방향이나 활동영역을 달리할 뿐 아니라 각기 산란의 시기도 달리함으로써 생태적 지위를 미묘하게 조정하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식물들의 경쟁

 

다윈은 동물뿐 아니라 식물 역시 치열한 경쟁에 의해 도태(혹은 선택)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통해 그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했다. 이름하여 ‘수학의 원리“라는 것인데, 20여 종의 초본이 자라고 있는 한 지역의 목초지를 두 구역으로 울타리를 쳐서 다른 외부의 간섭이 없도록(초식동물의 접근을 차단)한 다음에 한 곳은 주기적으로 벌초를 해주고 한 쪽은 그냥 방치해 두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두 지역의 종 다양성을 비교해 보았더니, 주기적으로 벌초를 해 준(수확을 한) 곳은 20종의 초본이, 방치한 곳은 11종의 초본이 있었다.

즉 자연 상태에서 식물을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경쟁에 의해서 식물들 간에 적자생존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한 오류이다. 식물이라고 하는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태계의 순환 고리에 의해서 식물이 생산자라고 하면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있어야만 생존을 하거나 종을 번식할 수가 있다. 다윈의 실험에서 울타리를 쳐놓고 소비자의 참여를 차단한 곳(방치한 곳) 은 불완전한 생태이다. 오히려 벌초를 해준 곳이 인위적이긴 하지만 소비자의 참여가 이루어진, 즉 토끼와 노루와 그 밖의 먹이 선호도가 다양한 초식동물이 참여한 상대적으로 자연에 가까운 생태인 것이다.

이 실험의 결과는 경쟁에 의한 적자생존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물들의 세상은 그들만의 관계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다양한 생태계의 구성요소들을 포괄적으로 고려해서 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결국 경쟁이란 생태계의 어느 한 단면을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생태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창’이 될 수는 없음을 시사한다.

 

우리의 숲도 일생을 가진다. 숲을 형성하는 식물의 천이과정을 살펴보면 나대지에 지의류가 들어온 후, 1년생 초본류, 다년생 초본류, 키작은 나무, 키큰 나무 순으로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설명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쟁취한다. 박탈당한다. 쫓겨난다는 개념으로 설명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경계를 해야 한다. 지의류들은 어떠한 생물도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지의류들이 아직 토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척박한 환경에 생명의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유기산이 바위의 무기물질들을 녹여서 토양을 만들어내고, 이 토양은 1년생 초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된다. 1년생 초본들이 죽고나면 토양이 비옥해지면서 다년생 초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고,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고 극상림을 이루는 것이다. 극상림을 이루고 난 후에는 자연현상의 하나인 산불이 나고, 숲은 일생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생태적 지위를 가진 식물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새로운 숲의 일생이 시작된다. 이렇게 숲 생태계의 순환(일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단계는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지, 누가 누구한테 쫓겨나고, 누가 누구한테 경쟁에서 밀리고 하는 개념은 아닌 것이다.

 

진정한 자연의 정신, 협동

 

자연의 세계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생물은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생물도 자기 홀로 존재하는 생물은 없다는 것이다. 최소 한 종 이상의 다른 생물들과 협동하고 있다는 뜻인데, 협동의 종류와 방법은 서식처 제공, 먹이 공급, 번식 및 이동수단, 보호와 경보수단, 치료와 청소 등 실로 다양하여 그 예를 일일이 언급하는 것 조차 벅찰 지경이다.

동물의 곪은 상처에서 부화한 청파리와 검정파리의 애벌레는 고름을 먹고 자라면서 상처부위의 조직을 처리하며, 이들이 내놓는 배설물은 살균작용을 가진다고 하니 별의별 참혹한 협동관계도 다 있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생태학에서 가장 철저히 증명되었던 원리 중 하나인 ‘가우스의 원리’(두 종의 생물이 똑같은 생태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는 결코 없다)나 포식과 피식의 생태적 의미를 재조명한 저명한 생태학자 오덤(Eugene Odum)의 생태학적 통찰 등 다양한 생태학적 연구를 종합하면, 자연은 경쟁적 투쟁을 회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절되어 있으며, 투쟁이 아니라 평화로운 공존이 자연계의 법칙이란 사실이다. 콜린버(Paul Colinvaux)는 결론적으로 ‘적자(fit animal)란 싸움을 잘하는 동물이 아니라 언제든지 싸움을 회피하는 동물“이라고 간결히 표현한 바 있지만, 싸움을 회피할 뿐 아니라 자기와 상반된 힘을 가진 자와 협동하는 생물이 자연계의 진정한 적자라 할 수 있겠다.

 

패러다임(Paradigm)을 바꾸자

 

왜곡된 진실

 

‘생물은 무한히 증식하려는 본능을 가졌다

그러나 자원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생물간에 경쟁은 불가피하다‘

 

다윈이 자연으로부터 발견했다는 이와같은 진실은 진실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다윈의 적자생존론은 인문 사회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바로 경쟁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즉, 모든 가치판단의 잣대가 경쟁에 있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나 자신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데 자주 쓰이는 말이 있다. 새 생명이 잉태되는 그 순간에도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수 억개의 정자 중 하나가 난자와 결합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벌여서 오직 하나의 정자가 선택된다는 데, 그 하나가 바로 나이니 내가 얼마나 소중하냐는 것이다.

일견 결과만을 두고 볼 때는 그러하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자만이 선택될 뿐인데, 왜 그렇게 많은 정자가 필요했을까? 생물이 우리가 믿고있는 것처럼 그렇게 비효율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수의 정자가 필요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생명의 씨앗, 난자가 존재하는 곳은 신성하며, 외부로부터 온갖 병원균의 침입과 감염에 대비하는 특별한 방어시스템이 있다. 정자가 난자의 이러한 방어시스템을 뚫기 위해서는 일정 규모의 정자군단이 필요한 것이다.

오랜 레이스 끝에 맨 먼저 도착한 정자가 수정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난자의 바깥은 투명대라고 하는 거대한 방어벽이 있고, 이 방어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은 정자의 머리 부분에 있는 첨체라고 하는 곳에서 분비되는 분해효소의 작용이 필요하다. 방어벽을 뚫기 위해서는 여러개의 정자가 번갈아 가면서 협동작전을 펼쳐야만 한다.

이렇듯 신비로운 새생명의 탄생은 수많은 동료 정자들의 희생과 협동의 결과인 것이지, 똑똑하고 잘난 능력있는 어떤 정자 하나의 성취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친 자랑스런 성취에 도취하기 전에, ‘나’라고 하는 존재의 탄생을 위해 함께 노력한 수없이 많은 협력자들의 희생과 협동의 정신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한 희생과 협동의 결과가 ‘나’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도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

 

시골에 가면 어디서든 소를 만난다. 우직하고 강력한 추진력의 상징동물인 소의 생존을 좌우하는 것은 우습게도 세균이다. 소는 초식동물이지만, 식물의 주요 에너지 저장물질인 섬유소를 분해하는 능력은 없다. 섬유소를 포도당으로 분해하여 소에게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역할은 소의 혹위에 살고 있는 섬유소 분해세균(cellulolytic bacteria)이 담당한다. 소는 세균에게 안정된 서식처를 마련해주고, 세균은 소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는 협동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소와 세균의 협동관계가 깨어지는 순간 소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악어새와 악어, 뿌리혹박테리아와 콩과식물 등에서도 이와같은 협동을 통한 공생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자연에 나가 조금만 주의깊게 관찰을 해보면,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생물들은 서로 경쟁을 회피하며, 오히려 상반된 힘을 가진 자와 협동을 하면서, 환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의 생태학적 현상중에서 가장 설명하기 곤란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현상이 ‘경쟁’인 것은 사실이지만, 단언하건데 자연에서는 자기만의 고유한 생태적 지위를 가지거나, 협동하는 생물만이 살아남는다.

 

자연은 경쟁의 메카니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협동과 조화의 메카니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으로 압축되는 경쟁의 논리가 아니고, 오히려 경쟁을 회피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생태적 지위를 갖거나 상반된 힘을 가진자와의 협동의 논리이다.

 

 

자연에서 배우는 지혜

 

이상에서 경쟁이 자연계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 아니라 평화로운 공존이 자연계의 법칙임이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자연으로부터 배운대로 사는 삶일까?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서로 협동하면서 사는 것, 이미 누군가 선점하고 있는 좁은 생태적 지위를 탐하여 경쟁하지 말고, 자신만의 고유한 생태적 지위를 만들어 가는 창의적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다.

 

 

위의 글은 생태건축연구소와 정림문화재단이 발행한 ‘생태주의 건축과 환경1’에 서경대학교 생물공학과 조 흥범 교수가 쓴 글을 임 수태가 발췌하여 약간 편집한 것입니다.

살벌한 경쟁을 넘어 아름다운 공존의 세계를 꿈꾸며 진보적 실천을 하고 계시는 분들께 도움이 될 좋은 글이라 여겨져서 글 대부분을 뽑아 함께 나누어보기로 했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9년 3월 9일 임 수태

 

 

'천하명문, 천하우스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기 또 한 사람이 갑니다  (0) 2009.12.03
승자와 패자의 차이  (0) 2009.12.03
리더쉽에 관하여  (0) 2009.12.03
사람들은 묻습니다  (0) 2009.12.03
부패한 관리  (0) 2009.12.03
Posted by 비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