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우리가 드러내고 있는 심리 상태는 어떤 것일까?

보통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예민하고 날카롭고 격정적이다. 공감의 강도도 엄청나다. 사람에 대한 기대 수준도 대단하다.

분노하라, 가만히 있지 않겠다. 당신이 대통령이어서는 안되는 이유. 목숨을 걸고 이글을 쓴다. 선장은 살인마, 박근혜 정권에 의한 학살,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 추모만 하지 말고 거리로 뛰쳐 나와라, 시체 장사, 광주 사태와 같은 폭동에 대비하라. 정몽준과 박근혜의 눈물은 악어의 눈물, 미개한 국민 등등’.

좌든 우든 가리지 않고 평상시 같으면 생각하기 어려운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가면 격정도 극단도 서서히 사그라들고 우리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본래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한 박자 쉬어가는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 우리의 삶을 이성적으로, 혹은 냉정하게, 차분하게, 평상심으로 한번 돌이켜 보고 싶다.

이런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직도 살만하다’.

우리는 이런 말을 가끔 듣는다. 삶은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고 행복일지 몰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고역이고 고통이며 심한 경우는 저주이고 지옥일 수도 있다. 잘 나가는 부모를 골라 태어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삶은 참으로 버겁다. 세상은 끊임없이 돈이 있어야 잘 산다고 하는 데 돈을 번다는 것이 정말 어렵지 않은가? 세상은 경쟁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데 경쟁력이라는 게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죽어라고 노력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손 놓고 있으면 모르지만 너도나도 그 경쟁력이라는 것을 갖추기 위해 온갖 노력, 온갖 짓을 다 하는 데 날고 뛰는 놈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남을 앞질러 갈 수 있단 말인가? 경쟁력이라는 건 나 혼자 열심히 노력하기만 한다고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건희나 정몽준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재벌회사의 회장님은커녕 사원이 되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따라서 이런 세상에서 삶은 누군가에게는 축복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저주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세상인 데 선행이나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은 감상적이다(감수성 과잉이라고 할 만큼). 보통 사람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선행이나 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 하구나가 아니라 이런 사람이 필요없는 세상이어야 하는 데...’. 특별히 따뜻한 마음이나 의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감동이나 위안을 받는 사회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있을 이유가 없는 사회가 나에게는 살만한 사회이다. 사실 세월호의 박지영을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은 의인과 다르거나 심지어는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만 살고 보자,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돈벌자. 출세하자’, 이게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드러내는 일반적인 태도다.

( 한적한 시골길에 버스 한 대가 달린다. 한 남자가 손을 들자 여성 운전사가 차를 세워 그를 태운다. 버스는 다시 달리고 잠시 후 또 두 남자가 차에 올라탄다. 그들은 강도로 돌변해 승객들을 위협하고 돈을 갈취한다. 강도들은 내리면서 운전사를 길가 풀섶으로 끌고가 성폭행한다. 버스 안의 승객들이 모두 외면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아까 탔던 남자만이 강도들의 악행을 제지하려 한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그는 강도의 주먹에 얻어맞고 휘두른 칼에 상처까지 입은 채 쓰러진다.

2001년 제58회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비롯해 국제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던 11분짜리 중국 단편영화 <버스 44>의 전반부 내용이다. 데이얀 엉(伍仕賢) 감독을 국제적 스타 반열에 올린 <버스 44>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고 하며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다. 이 영화의 내용이 최근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제목이 어느 버스 기사등으로 바뀌고 시점이나 강도 숫자 등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줄거리와 주제는 영화 그대로다.

한참 뒤 깡패 3명과 여성 기사가 돌아오더니 여성 기사는 아까 깡패를 제지하려다가 다친 중년 남자한테 다짜고짜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중년 남자가 황당해하면서, ‘아까 나는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니까 기사가 소리 지르면서 당신이 내릴 때까지 출발 안 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중년 남자가 안 내리고 버티니까 승객들이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짐도 땅바닥으로 내던져버렸습니다. 그러고 버스가 출발했는데.”

홀로 남은 남자는 다친 몸을 이끌고 어렵게 다른 차에 편승하게 된다. 얼마 후 그는 참혹한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바로 그가 탔던 44번 시외버스가 절벽 아래로 추락한 것이다. 경찰은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전한다. 여성 운전사가 그만 내려놓고 모두 저승으로 데려간 셈이다. 그녀가 성폭행당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던승객들은 과연 죄인일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세월호 사태 국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 그 버스 안의 승객은 아닌지요?” 글을 올린 누리꾼의 논평처럼)

버스 안의 승객들이 모두 외면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강도들의 악행을 제지하려다  강도의 주먹에 얻어맞고 휘두른 칼에 상처까지 입은 채 쓰러진 이 영화 속의 남자가 세월호의 박지영이고 정차웅이고 사무장이다. 강도를 외면했던 승객, 남자가 안 내리고 버티니까 그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짐도 땅바닥으로 내던져버린 승객들이 보통 사람들, 나같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시류(세상의 흐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평상시와는 달리 굉장히 도덕적이고 정의로우며 이타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극한 상황, 말하자면 대형 참사나 부정 부패 같은 상황에 맞닥뜨릴 때이다. 사고는 돈 때문에 나고 침몰하는 배에서 구조가 되지 않는 것은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이야 죽든말든 돈벌이에만 몰두하고 나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짓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특별히 나쁜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 아니다. 아마 나라도, 당신이라도 그렇게 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 왜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는지 물으면서 인간성을 탓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탈출하라는 말 한마디로 모두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은 물론 맞다. 이것만 놓고 보면 복잡하게 따질 것 없이 사람의 문제이다. 그런데 왜 이런 간단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는가? 문제는 거기에 있다. 분명히 간단하게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을 살릴 조치를 하지 않은 데에는 신만이 아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목적을 위해서는 니가 희생되어야 한다, 혹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니가 죽어 주어야 한다’. 이런 차원의 어떤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세월호 참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비약으로 보이는가? 시체 장사니, 공부의 기회니, 교통사고 사망자수에 비추어 보면 별 것 아니라느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내가 떠올리는 것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안전이나 생명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되지 왜 제주도로 가다 그런 변을 당한단 말인가? 대통령이 무슨 잘못이냐, 미개한 국민들이다. 보상에서 장례비용이나 조화 값을 공제하겠다. 미안해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까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에서 이런 말을 참지 못하고 뱉어내는 사람들은 참으로 자본주의적이지 않은가? 자본주의라는 성역 안에 살면서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을 버러지만도 못하게 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300명 정도가 죽는 것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배안으로 들어가 탈출 하라고 말하라는 명령을 받은 해경이 경사가 심하고 배가 침몰하고 있기 때문에 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거기에 대통령이나 하다 못해 장관의 자식들이 있었어도 그럴 수 있었을까? 이런 주장이 억지 소리로 들리는가? 이렇게 보면 문제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체제의 문제 즉 자본주의의 문제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자본주의에서는 사람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부자와 가난뱅이로 나눌 뿐만 아니라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로도 나눈다. ‘돈보다 사람, 이윤보다 생명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람이나 생명의 중요성은 아무에게나 적용되는 게 아니다. 가난뱅이, 약자, 패자의 안전이나 생명까지 고려할 만큼 자본주의가 인간적일 수 있는가? 이러다가 돈은 언제 벌고? 자본주의란 글자 그대로 돈을 기본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돈이 기본이고 나머지는 돈을 버는 데 이용하거나 동원해야 할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돈보다 소중한 사람은 사람 일반이 아니고 자본가, 강자, 승자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반대하지 않으면서 사람의 안전과 생명을 돈보다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정한 체제인지 모르고 좋은 소리만 읊어대는 것은 한가한 도덕군자나 할 짓이다. 짐승보다 못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낳는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고 인간을 향해 착하게 살라고, 의인이나 영웅이 되라고 훈계만 해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강의 상류에서 흙탕물을 일으키는 공사를 하면서 새물을 아무리 갖다 부어도 하류의 물은 맑아지지 않는다. 상류에서 모래를 푸거나 강바닥을 파헤체는 공사를 하면서 하류의 물이 맑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타인은 어떤 존재일까? 돈벌이 하는 사람에게는 고객이거나 경쟁자이고,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경쟁자이거나 표다. 나의 이익이나 필요와 무관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자본주의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뛰어넘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게 자본주의 아닌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세월호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났을 때의 반짝관심 정도다. 조그만 사고나 사건 혹은 일상적인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감각하게 살아간다. 인간의 삶을 얽어매는 사회의 조건이 어떻든 양심적이고 착하며 의롭고 용감한 사람을 머리에 그리는 것은 극히 비현실적이다. 부모 자식 형제간에 서로를 생각하듯 남남끼리도 서로 생각해주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를 만들어야 인간에게 인간이기를 요구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인간이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자본주의의 이런 요구를 무시하거나 거스르는 사람은 반드시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을 자본주의는 똑똑히 가르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을 교육을 통해, 실생활을 통해 뼈속깊이 새기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여기거나 나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지금 사람들의 모습이 사람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사람을 탓하기 전에 자본주의를 탓해야 한다. 대안이 있느냐,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한 것 아니냐는 말로 자본주의가 만악의 근원임을 인정하는 데 머뭇거려서는 안된다. 치료의 방법이 있느냐는 다음 문제이고 병의 원인은 원인대로 제대로 짚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부모는 멀리 보고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고 가라 한다. 부모는 함께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 가라 한다는 어떤 공익광고의 문구처럼 우리는 이상과 현실, 정의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현실을 선택한다. 이게 경쟁사회,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이다.

만일 자본주의 체제일지라도 사람들이 도덕적이고 이타적이고 정의롭게 살 수 있다면 굳이 남다르게 착하고 의롭고 용기있는 사람이 나타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좋은 나라는 의인들이 많은 곳이 아니라 의인이 있을 이유가 없는 나라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터지면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즉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왔는지를 잊고 갑자기 도덕적으로 된다. 그리고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사람과 사회 정부 나라를 겨냥한다. 돈이나 이윤보다 사람과 생명을 더 중시할 것, 직책상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할 것, 정확한 매뉴얼을 만들고 엄격하게 관리하고 감독하고 이행할 것,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규정을 어기지 말 것 등등의 기준에 따라 책망하고 개탄하고 꾸짖기만 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자본주의가 사람을 어떻게 짐승보다 못하게 만들어버리는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면서 돈의 유혹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지켜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이 얼마나 이타적일 수 있는지, 자본주의는 정말로 사람에게 좋은 체제인지 물어보지 않는다. 근본적인 물음 없이는, 아니 자본주의를 이대로 두고는 아무리 분노하고 행동해도, 그리하여 박근혜가 물러나고 새누리당이 없어져도 세월호는 다시 되풀이 된다. 돈과 이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라는 게 자본주의이고 이런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호를 맡겨두는 한 세월호는 되풀이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고 사람이 달라지기를 바라서는 안된다. 자본주의가 없어져야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도 없어진다. 야만의 체제를 신봉하거나 용인하고 혹은 그 체제에 굴종하면서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도덕주의에 빠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돈이 사람의 행복과 운명을 가르는 체제를 그대로 두고 사람들에게 도덕성, , 책임감, 희생정신, 감투정신, 영웅적 용기를 강조하는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나아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다.(2014. 5.)

 

Posted by 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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